작품은 벽에만 걸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날의 공기와 침묵에도 벤치의 나무 결에도 있었습니다 오늘은 감상보다 머물날이 필요했던 날 그날 미술관에 간 이유는 딱히 전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집에 있긴 싫고 카페는 시끄럽고 어딘가 조용한 공간에서 나를 잠깐 내려놓고 싶었습니다


1. 그저 익숙한 장소를 찾듯 내가 자주 가던 미술관으로
전시 이름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습니다 그저 익숙한 장소를 찾듯 내가 자주 가던 미술관으로 발길이 향했습니다 벽에 걸린 작품들을 보며 한 바퀴를 돌다가 유독 발걸음이 느려졌던 공간이 있었습니다 햇빛이 스며드는 창가 그리고 그 아래 놓인 오래된 나무 벤치
그 벤치에 앉는 순간 나는 전시회를 본다는 목적보다 그 공간에 머문다는 감각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작품보다 더 오래 그 벤치 위에서 시간을 바라보았습니다 무언가를 느끼려 애쓰지 않아도 그저 있는 그대로의 공기가 위로처럼 다가왔다 벤치에 앉으니 그림이 아니라 사람이 보였다 전시장을 걷고 있을 땐 벽에 걸린 그림만 눈에 들어왔다 작가의 이름 제목 재료 연도…
하지만 벤치에 앉아 있으니 그림보다 사람들의 얼굴이 더 자주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커플은 작품 앞에서 속삭였고 한 중년 여성은 두 손을 꼭 모은 채 긴 시간 같은 작품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그림보다 바닥 문양에 관심이 더 많아 보였습니다 미술관 안의 침묵은 그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들 각자의 고요한 감정들이 공간에 스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알았다 작품은 벽에만 걸려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는 그날의 감정을 그림에 기대고 누군가는 그 조용한 공기 속에서 스스로를 다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 역시 내가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그 벤치 위에서 천천히 꺼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분했던 시간 미술관에선 뭔가를 봐야 한다는 압박이 있습니다 설명문을 읽고 작가를 검색하고 의미를 해석하고… 하지만 그날 벤치에 앉아 있던 시간엔 그 어떤 정보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작품을 설명하는 글보다 그림 옆의 여백이 더 좋았고 형식보다 색감이 먼저 다가왔습니다 나는 그냥 햇빛이 벽에 닿는 모습을 오래 바라봤습니다
2. 미술관은 감상보다 여백을 배우는 곳
누군가 지나갈 때 그림자 모양이 달라지는 걸 보면서 그저 이건 그림이 아니지만 미술관은 감상보다 여백을 배우는 곳 그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마음이 채워지는 순간 미술관은 그걸 허락하는 몇 안 되는 장소다 모든 공간이 기능을 요구하는 도시에서 벤치 위에 앉아 가만히 있는 행위가 가장 창의적이고 사적인 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미술관은 감상보다 여백을 배우는 곳 그날 미술관에서 얻은 건 새로운 작품에 대한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빈 공간과 침묵 그리고 비워짐의 감각이었다 우리는 항상 채우려고 한다 시간 감정 스케줄 목표…
그런데 그 벤치 위에서 보낸 한 시간은 채움보다 여백의 미학을 알려주었습니다 미술관의 작품들도 사실 여백 위에 존재합니다
한 붓 그은 선의 주변은 온통 비어 있고 강렬한 색채도 결국 그 주변의 공백 덕분에 돋보입니다
내 삶도 그랬습니다 무언가 열심히 해내는 날보다 가만히 멈춰 있던 날들이
더 오래 기억 속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날처럼 그림보다 벤치를 오래 기억하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건 예술이 정지된 감동으로 남는 방식이 아니라일상의 시간과 교차하면서 살아남는 방식이었습니다
3. 그것만으로 충분히 예술적인 순간
전시회보다 벤치가 더 좋았던 날은 내가 무엇을 느끼기 그것만으로 충분히 예술적인 순간 위해서가 아니라 느끼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에 도달한 날이었습니다 예술은 꼭 해석되지 않아도 된다 작품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 공간 안에서 나 자신을 잠시 쉬게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예술적인 순간입니다 그날 벤치에 앉아 느낀 건 그 어떤 유명한 작품보다 오래 남았다
그리고 언젠가 또 그런 날이 오면 나는 전시보다 벤치부터 찾을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진짜 나와 마주하는 장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