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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회보다 미술관의 벤치가 더 좋았던 날

by 시리의 생활 2025. 6. 25.

작품은 벽에만 걸려 있지 않았습니다 그날의 공기와 침묵에도 벤치의 나무 결에도 있었습니다 오늘은 감상보다 머물날이 필요했던 날 그날 미술관에 간 이유는 딱히 전시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집에 있긴 싫고 카페는 시끄럽고 어딘가 조용한 공간에서 나를 잠깐 내려놓고 싶었습니다

전시회보다 미술관의 벤치가 더 좋았던 날
전시회보다 미술관의 벤치가 더 좋았던 날

1. 그저 익숙한 장소를 찾듯 내가 자주 가던 미술관으로

 

전시 이름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습니다 그저 익숙한 장소를 찾듯 내가 자주 가던 미술관으로 발길이 향했습니다 벽에 걸린 작품들을 보며 한 바퀴를 돌다가 유독 발걸음이 느려졌던 공간이 있었습니다 햇빛이 스며드는 창가 그리고 그 아래 놓인 오래된 나무 벤치

그 벤치에 앉는 순간 나는 전시회를 본다는 목적보다 그 공간에 머문다는 감각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작품보다 더 오래 그 벤치 위에서 시간을 바라보았습니다 무언가를 느끼려 애쓰지 않아도 그저 있는 그대로의 공기가 위로처럼 다가왔다 벤치에 앉으니 그림이 아니라 사람이 보였다 전시장을 걷고 있을 땐 벽에 걸린 그림만 눈에 들어왔다 작가의 이름 제목 재료 연도…


하지만 벤치에 앉아 있으니 그림보다 사람들의 얼굴이 더 자주 눈에 들어왔습니다 한 커플은 작품 앞에서 속삭였고 한 중년 여성은 두 손을 꼭 모은 채 긴 시간 같은 작품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아이는 발을 동동 구르며 그림보다 바닥 문양에 관심이 더 많아 보였습니다 미술관 안의 침묵은 그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들 각자의 고요한 감정들이 공간에 스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알았다 작품은 벽에만 걸려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는 그날의 감정을 그림에 기대고 누군가는 그 조용한 공기 속에서 스스로를 다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 역시 내가 느끼지 못했던 감정을 그 벤치 위에서 천천히 꺼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분했던 시간 미술관에선 뭔가를 봐야 한다는 압박이 있습니다 설명문을 읽고 작가를 검색하고 의미를 해석하고… 하지만 그날 벤치에 앉아 있던 시간엔 그 어떤 정보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작품을 설명하는 글보다 그림 옆의 여백이 더 좋았고 형식보다 색감이 먼저 다가왔습니다 나는 그냥 햇빛이 벽에 닿는 모습을 오래 바라봤습니다

 

2. 미술관은 감상보다 여백을 배우는 곳

 

누군가 지나갈 때 그림자 모양이 달라지는 걸 보면서 그저 이건 그림이 아니지만 미술관은 감상보다 여백을 배우는 곳 그림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마음이 채워지는 순간 미술관은 그걸 허락하는 몇 안 되는 장소다 모든 공간이 기능을 요구하는 도시에서 벤치 위에 앉아 가만히 있는 행위가 가장 창의적이고 사적인 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미술관은 감상보다 여백을 배우는 곳 그날 미술관에서 얻은 건 새로운 작품에 대한 지식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빈 공간과 침묵 그리고 비워짐의 감각이었다 우리는 항상 채우려고 한다 시간 감정 스케줄 목표…
그런데 그 벤치 위에서 보낸 한 시간은 채움보다 여백의 미학을 알려주었습니다 미술관의 작품들도 사실 여백 위에 존재합니다
한 붓 그은 선의 주변은 온통 비어 있고 강렬한 색채도 결국 그 주변의 공백 덕분에 돋보입니다

내 삶도 그랬습니다 무언가 열심히 해내는 날보다 가만히 멈춰 있던 날들이
더 오래 기억 속에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날처럼 그림보다 벤치를 오래 기억하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건 예술이 정지된 감동으로 남는 방식이 아니라일상의 시간과 교차하면서 살아남는 방식이었습니다

 

 

3. 그것만으로 충분히 예술적인 순간


전시회보다 벤치가 더 좋았던 날은 내가 무엇을 느끼기 그것만으로 충분히 예술적인 순간  위해서가 아니라 느끼지 않아도 괜찮은 상태에 도달한 날이었습니다 예술은 꼭 해석되지 않아도 된다 작품을 이해하지 못해도 그 공간 안에서 나 자신을 잠시 쉬게 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예술적인 순간입니다 그날 벤치에 앉아 느낀 건 그 어떤 유명한 작품보다 오래 남았다
그리고 언젠가 또 그런 날이 오면 나는 전시보다 벤치부터 찾을 것입니다 그곳이 바로 진짜 나와 마주하는 장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