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 없는 공감 침묵 속에서 들리는 목소리
누군가 내 이야기를 들은 것도 아닌데 그림 한 점이 내 마음을 먼저 알아채는 순간이 있다 마크 로스코의 붉고 검은 색면회화 앞에서 나는 말이 사라졌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듯한 화면인데 그 화면이 내 안에서 울려 퍼졌다 감정을 정확히 묘사하지도 않고 표정 하나 없이 가만히 있는 저 사각형이 어째서 내 마음을 이렇게 흔드는 걸까
예술은 종종 나보다 나를 먼저 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설명하기 위해 노력하곤 하지만 정작 내 감정은 설명으로 완전히 옮겨지지 않는다 어떤 슬픔은 너무 작고 어떤 외로움은 너무 커서 말로 옮기는 순간 왜곡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술 작품은 그 모호함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질문하지도 않고 확인하지도 않고 단지 그 자리에 존재하며 말한다 나는 알고 있어
이럴 때의 예술은 상담사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다 마치 한 명의 낯선 존재가 내면 깊은 곳의 감정을 미리 보고 온 것처럼 다가온다 나는 설명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이미 나를 이해한 채 존재하고 있었다 침묵 속에서 이뤄지는 공감 그것이 예술이 가진 유일한 언어일지도 모른다
- 분해된 나 다시 조립하기
우리는 일상에서 늘 정돈된 나로 살아야 한다 사회적 역할과 말투 표정 감정의 톤까지 계산하며 살아가는 게 익숙해진다 하지만 예술은 그런 나를 완전히 분해해 버린다 내가 숨기고 있던 감정 무시했던 기억 포장했던 상처들이 하나하나 끌려 나와 낱낱이 흩어진다
전시장을 걷다가 문득 마주친 비디오 아트에서 들려온 어린아이의 울음소리 파편처럼 깨진 거울로 만든 조각상 겹겹이 덧칠된 회화 속의 얼굴들 나는 그 앞에서 이상하게 안정을 느꼈다 분해되는 기분이 편안했다 나를 지탱하던 논리가 해체되는데도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예술은 나를 망가뜨리는 것이 아니라 다시 조립하게 해줬기 때문이다
조립의 과정은 빠르지 않다 하지만 예술이 제공하는 파편들은 나에게 어떤 순서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것을 먼저 느끼라고 저것을 이해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나는 단지 바라보고 느끼고 다시 바라보면서 나를 새롭게 구성해 나간다 마치 나를 새로 쓰는 일기처럼
예술은 나를 전부 다 바꾸지는 않는다 하지만 조용히 내 일부를 흔들고 무너뜨리고 다시 세운다 그러면서 나는 처음엔 알지 못했던 방식으로 ‘나’라는 존재를 이해하게 된다
- 감정은 이해보다 느끼는 것
우리는 자주 감정을 이해하려 한다 왜 내가 슬펐는지 무엇이 날 외롭게 했는지 분석하고 설명하려 한다 그런데 어떤 감정은 이유 없이 온다. 그리고 이유 없이 사라진다 예술은 그 이유 없는 감정들을 부끄러움 없이 인정하게 만든다
시를 읽을 때 음악을 들을 때 갑작스럽게 눈물이 나는 경험 그 감정은 정당화가 되지 않더라도 진실이다 예술은 감정을 판단하지 않는다. 슬픈 음악을 들으면 그냥 슬프고 불안한 영화는 그냥 나를 불안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 느낌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려준다
예술은 감정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느끼게 하고 머물게 하고 흘러가게 만든다 내가 내 감정을 다 설명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더 깊이 받아들이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때로는 설명보다 중요한 건 그냥 함께 있어주는 일이라는 걸 예술은 끊임없이 가르쳐 준다
- 나를 보지 않으면서도 나를 바라보는 방법
예술이 주는 독특한 경험 중 하나는 관계의 비대칭이다 나는 예술을 바라보고 있지만 예술은 나를 보지 않는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무표정한 그림 속에서 멀찍이 놓인 조각상 앞에서 나는 지켜보고 있다는 감정을 받는다
이것은 감시와는 다른 종류의 시선이다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눈이 아니다 예술은 단지 존재할 뿐인데 나는 그 존재 앞에서 나 자신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마치 어두운 방 안에서 나 혼자 거울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그 안엔 아무도 없지만 나는 나를 너무 선명하게 보고 있다 예술은 그런 ‘혼자 보는 시간’을 준다. 그것은 고독하지만 동시에 치유적이다
‘누군가의 시선’이 없어야만 가능한 정직함이 있다 예술은 나에게 그 정직함을 끌어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준다 남이 보지 않아서, 나는 내 진짜 마음을 꺼낼 수 있다
결국 예술은 나를 대신해서 나를 본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나는 그 앞에서 설명을 멈추고 잠시 조용히 머문다 그리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간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안고
예술은 우리에게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냥 거기 존재하고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게 한다 때로는 바라본다는 행위만으로도 우리는 스스로를 이해하게 된다 예술은 그래서 위로가 된다 말이 없어서 더 깊다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그것이 예술이 가진 가장 조용한 그러나 가장 확실한 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