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마음이 멈춘 순간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림을 좋아하게 된 계기는 사실 너무 사적인 감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전시장 한복판에서 제 마음이 딱 멈춰섰습니다 그림 한 점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히 유명한 작가도 아니었고 화려한 기법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그림 앞에서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음 전시실로 이동했지만 저는 혼자 그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림을 보고 있다기보다 그림에 붙잡혀 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설명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저 그 자리에 오래 머물고 싶다는 감정만이 분명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저는 그림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마음이 먼저 반응하고 눈은 그 반응을 따라가는 것 같았습니다
1. 그날의 감정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술을 이야기할 때 그날의 감정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대개 작품의 역사나 의미 기법 같은 걸 말합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유명한 화가가 누구인지 그림에 담긴 시대적 맥락이 뭔지부터 익히려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림을 좋아하게 된 진짜 계기는 그런 지식과는 전혀 상관없는 감정이었습니다 그날 전시장에서 제가 그림 앞에서 느꼈던 건 오래된 상처와 마주한 기분이었습니다 누구에게도 꺼내 놓지 못한 감정이었고 말로 설명할 자신도 없었습니다 그림은 그런 제 마음을 먼저 알아차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는 친구처럼 말입니다 그 감정은 너무 사적이어서 누구에게도 쉽게 이야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깊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저는 그림을 감상할 때마다 비슷한 장면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2. 그림 앞에서는 나를 감추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일상에서는 늘 어떤 역할을 수행하며 삽니다 그림 앞에서는 나를 감추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회사에서는 일 잘하는 동료 집에서는 책임 있는 가족 밖에서는 예의 바른 사람 그런 껍질들 속에 감춰진 본래의 감정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도 잘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림 앞에서는 다르게 행동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기쁘면 웃고 슬프면 울고 이해되지 않으면 그냥 바라보면 되었습니다 그림은 제 감정을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위로하지도 설명하지도 않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위로가 되었습니다 누군가 앞에서 울 수는 없지만 그림 앞에서는 울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건 일종의 허락이었습니다 마음대로 느껴도 된다는 허락 그림은 제게 그런 자유를 주었습니다
3. 그림을 좋아한다는 말에 담긴 건 마음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림을 좋아하게 된 이유를 누군가에게 그림을 좋아한다는 말에 담긴 건 마음의 고백이었습니다
설명할 때마다 망설이게 됩니다 단순히 아름다워서도 아니고 지적 호기심 때문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마음 깊은 곳의 고백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좋아하게 됐다는 건 결국 제가 저를 좀 더 들여다보기 시작했다는 뜻이었습니다 이전에는 감추고 외면했던 감정과 마주할 용기를 그림을 통해 조금씩 배웠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림 앞에 서는 일이 두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시간이 기다려집니다 한 장의 그림이 제게 남긴 건 예술의 가치나 미적 감상이 아니라 삶의 어느 구석에서 미처 마주하지 못한 감정과의 조용한 만남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그림을 좋아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 말의 진짜 뜻은 그림을 통해 나를 다시 만났다는 조용한 고백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