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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3시간, 텅 빈 방에서 나와 마주한 감정들

by 시리의 생활 2025. 6. 12.
  1. 문을 닫자마자 시작된 고요함의 낯섦
    하루의 업무를 마치고 현관문을 열었다
    여느 때처럼 어둡고 조용한 내 방
    딱히 반겨주는 것도 환기된 공기도 없이 묵직한 공기만이 가만히 있다
    가방을 내려놓고 불을 켠 그 순간 문득 마음에 걸리는 낯섦이 스쳤다 “오늘 하루도 끝났네”

그 말과 함께 밀려온 건 안도감이 아니라 어떤 막막함이었다

회사에서는 쉴 틈 없이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메일 회의 대화 메시지
하루 종일 말과 일이 얽혀 있다가 집에 돌아오면 모든 연결이 끊어진다
오로지 나 혼자
그 조용함은 가끔 평화롭지만 어떤 날은 현실보다 더 크게 느껴지는 공허함으로 다가온다

그날의 고요함은 유독 낯설게 다가왔다
내가 가장 익숙해야 할 공간이 가장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됐다
이 조용한 방 안에서 결국 나와 마주할 수밖에 없다는 걸

  1. 아무도 보지 않는 시간 속 진짜 얼굴이 드러났다
    퇴근 후 3시간 동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넷플릭스도 유튜브도 핸드폰도 멀리하고 그냥 가만히 있어보기로 했다
    지금까지는 늘 무언가로 채워야만 마음이 진정됐었다
    하지만 오늘은 텅 빈 상태로 있어보고 싶었다

처음 30분은 무척이나 어색했다
소파에 앉아 멍하니 벽을 보고 있는 게 이렇게 불편한 일이었나 싶었다
마치 수면 위에 떠오른 먼지처럼 미뤄둔 감정들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오늘 회의 때 왜 그렇게 말했지?”
“그 말 진짜 기분 나빴는데 왜 참았을까”
“나는 지금 뭘 하고 싶지?”
이런 질문들이 무방비로 몰려왔다
평소엔 무시하고 지나갔던 감정들이었다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이 시간 진짜 얼굴을 드러낸 건 내 감정이었다

텅 빈 방이 나를 정직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나를 연기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이다
이 조용한 시간 속에서 나는 내 마음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내기 시작했다
불편했지만 거짓 없이 솔직해지는 시간이었다

  1. 외로움이라는 감정의 정체와 가까워지기
    어느새 시계는 저녁 9시를 지나고 있었다
    불은 희미하게 줄이고 조용한 음악을 틀었다
    방 안엔 여전히 나 혼자였지만 이제는 그 고요함이 조금 익숙해졌다

이쯤에서 떠오른 감정은 ‘외로움’이었다
그동안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마다 나는 약속을 만들거나
SNS를 들여다보며 그 감정을 눌렀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느껴보기로 했다

외로움은 생각보다 날카롭지 않았다
차라리 조용하고 천천히 번지는 안개 같았다
그 안에서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래 조금은 외로워도 괜찮아. 오늘도 애썼잖아”

외로움은 꼭 누군가가 없는 상황에서만 오는 게 아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회식 자리에서도
심지어 소통이 넘치는 SNS 속에서도 찾아오는 감정이었다
그러니 지금 이 방에서 느끼는 외로움은
어쩌면 가장 정직하고 자연스러운 감정인지도 모른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외로움을 나쁜 감정으로 보지 않았다
그저 나의 존재가 고요하게 드러나는 순간처럼 느껴졌다
외로움과 싸우기보다 같이 앉아주는 시간
그게 퇴근 후 3시간 동안 내가 가장 배운 일이었다

  1. 텅 빈 방이 선물한 진짜 회복
    무언가 하지 않으면서오히려 나는 더 회복되고 있었다
    요란한 취미도사람과의 대화도 없이 단지 나만의 공간과 시간을 가지는 것
    그건 생각보다 크고 깊은 회복을 가져왔다

그 3시간 동안 나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의 너, 잘 살았어. 충분히 괜찮았어”
누군가의 평가 없이도,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다는 건 굉장한 자유였다

하루에 3시간
하루 전체 중 단 1/8의 시간이다
하지만 그 시간은 남은 7/8의 삶을 훨씬 덜 흔들리게 만들어줬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것이 뭔지
지금 무엇이 불편한지
무엇을 비우고 싶고 무엇을 지키고 싶은지를
들여다보는 소중한 공간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회복’을 위해 시간을 쓴다
요가를 가고 명상을 배우고 산책을 하기도 한다
그 모든 것도 좋지만
때로는 그냥 조용히 나 혼자 있는 시간이
가장 본질적인 회복이 되어줄 수 있다

텅 빈 방은 그 어떤 말보다도 정확하게 말했다
“너 지금 충분히 잘 살고 있어”
그리고 나는 그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퇴근 후 3시간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나는 나와 마주했다
그 시간은 불편했지만 동시에 가장 진솔한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는 늘 바쁘게 살고 늘 연결되어 있지만
진짜로 필요한 건 연결 이전의 ‘나와의 연결’일지 모른다

그 3시간 동안 나를 지켜봐 준 건
스크린도 대화도 음악도 아니었다
오롯이 나 자신이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그 시간들이
내일을 살아갈 힘을 조용히 만들어준다는 것을